[김진목 칼럼] - 감사와 불평, 무엇으로 살 것 인가 ?
감사는 사전적 의미로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하고, 불평은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그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냄’이라고 정의한다.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제5장 16-18절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기쁨과 기도를 늘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누구나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은 당연히 감사하지만 괴로운 일과 고통은 감사는 커녕 오히려 불평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고난이 닥쳐왔는지 스스로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기쁜 일에는 감사하지만 그 반대는 불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늘 자신도 모르게 도움을 받거나 주고 사는 것이다. 물과 공기가 흔하여 고마움을 모르듯이 사회 전체가 서로 협력하는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을 잘 몰라서 그렇다. 실제로 먼 곳을 이동할 때 전철이나 버스, 택시 기사가 감사하고, 거리를 말끔히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어 감사하며,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있어 감사하고, 강건한 육체가 있어 감사하며, 직장과 동료가 있어 감사하고, 보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눈과 입술과 귀가 있어 감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불평할까?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과 축복을 망각하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런 것이다. 즉 상대적 열등감 때문에 그렇다. 주어진 환경이 자신보다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더욱이 아프리카나 북한처럼 먹을거리가 없어 고생하는 수 억 명의 사람을 생각하면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불평하는 자들은 매사 비관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의 생각은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며 인생의 목적이 뚜렷지 않고, 노력도 비전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들이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까? 이제라도 이들은 사고전환을 통하여 삶의 변화를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까? 우선 ‘마음을 바르게 잡는 것’이 필요하다. 삐뚤어진 마음상태로는 어떠한 훌륭한 대안도 그에게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 중심이 아니라 바로 이웃중심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 홀로 삶’이 아니라 바로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라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까? 우선 움켜쥔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리고 좌우로 이웃과 친척과 동료와 친구들을 바라보자.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깊은 고민을 해 보자! 분명히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자. 그리고 그들을 위해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자! 분명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불평의 마음에서 평안의 마음으로’ 변화가 올 것이다. 바로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이웃을 위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정리하자! 불평과 불만, 그리고 만족과 감사의 삶, 무엇으로 살 것인가? 그 현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문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깨닫고 말로만 아닌 ‘행동으로 옮기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실천적 삶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본인중심에서 이웃중심으로, 받는 중심에서 주는 중심으로, 시기와 질투에서 사랑과 배려중심으로, 비판중심에서 이해중심으로, 징벌중심에서 용서중심으로, 비교중심에서 만족중심으로, 과거중심에서 미래중심으로 우리 마음을 바꾸어보자! 진정 마음의 변화가 요동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불평’보다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미처 생각지 못할 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그 ‘감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의 무지개’를 끝없이 쫓아다니다가 결국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들이 함께 있는 가정’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을 주로 황혼이 돼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songtel
- 정치학박사 김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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